top of page

디자인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위해,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곳, 상일의유산

Finding something beyond the design, A place not bound by time, HERITAGE OF SANG IL 상일의유산.

I define this 'Easy Design'
Easy design means designing easily.

Design is something that is not huge, artificial, serious, complex, difficult, but the transferring what you think.

디자이너로서 정체성

 

1. 이래보나 저래보나 남들보다 나을 것 없는 디자이너다.

2. 그래서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디자인을 한다. 

3. 내가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진보성'이다. 진보성은 디자인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진보성은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과 대한 긍정적인 태도이고, 맹목적이고 당연함이라는 관성을 향한 저항이다. 

디자이너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습성을 가진 존재이다. 끊임없이 현시대를 인식해야 하고 시대를 앞서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제안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간혹 배타적인 사람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왜 넌 굳이 이렇게 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불편해 해?"라고 한다.

확고하게 디자이너 중에서도 '컨셉터'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컨셉터를 '디자인을 할 때 생각과 철학을 중요하게 다루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내 생각과 개념을 오브젝트에 투영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문제를 다루는 컨셉터다.

나의 디자인에 담긴 메세지로 사회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기존에 본 적 없었던 진보적인 디자인. 

남들이 말하는 디자인의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디자인을 목표로 한다. 내가 쓰는 용어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무릎을 탁! 칠 때 희열. 전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 그런 순간이 재밌다. 

2012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상일의유산' 프로젝트. www.HERITAGEOFSANGIL.com

여러 면에서 나을 것이 없는 디자이너지만 한가지 자신있는 것은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디자이너로서 확고한 정체성.

재능은 없다. 태도만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훈련이었다. 굳은 땅처럼 완고한 나라서, 굳어지지 않으려고 머리 깊숙한 곳으로부터 머리 바깥 더 먼 곳, 더 높은 곳, 상상할 수 없는 곳을 향해 벽을 깨고 또 깨고 나아가는 걸 끊임 없이 반복한다. 계속 깨쳐 나아가다가 어느새 날아다니는 것 같은 성취감에 젖어 있을때 또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사실은 심연 부터 바깥까지 벽을 부수며 나아가왔다고 생각했지만 내 등 뒤에 나도 모르게 내가 만든 벽들이 서있다. 돌아가려면 다시 벽을 부숴야하고 깨야한다. 끊임 없이 부수면서 파고 들어야 한다. 

결국 마지막 하나 남은 알갱이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한다.

주로 어떤 디자인하는가

어떤 것을 디자인 하기 보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한 디자이너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냥 "딱히 뭔가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다. 그냥 떠오르면 그것을 디자인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길게 풀어서 말하면, 제품은 대학 전공학과라서 열심히 하게 되었고, 무엇을 하느냐에 관계 없이 그냥 디자인 행위 자체가 좋다. 주로 아이디어, 흘라가는 의식의 흐름, 관념(ex - 배고프다 밥을 달라), 개념(ex - 귀차니즘)등을 오브젝트에 연결시켜 작업한다. 다만 그 표현의 형식과 결과가 디자인에 가까운 것이다. 기존에 있던 것도 디자인하고 없던 것도 디자인한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로서 나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먹고 살 궁리를 하고 있다.

디자인이 재미있는 이유는

내 적성에 맞다. '생각한 것을 디자인한다' 생각을 시각화하여 구체화하고 실현시키는 행위. 디자인에서 생각을 하는 부분이 좋다.

이유 1. '룰은 내가 만든다', 내가 창조 한다. 내가 의도했던 생각과 사건들을 디자인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마주하는데서 재미를 느낀다.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유 2. 이상하게도 처음 디자인을 배울 때부터 '세계 최고'라하는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을 볼 때 마다 '나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노력하면 저만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다. 이건 왜 이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당시는 아무것도 몰라서였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너무 멀고 비현실적일 수 있는 생각이 나에게는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착각을 가지고 산다. 

내 인생에서 무엇보다 행복이고 다행인 것은 이런 태도(희망)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클래식 디자인을 목표 한다 

나는 '클래식 디자인'이라는 영원한 가치, 즉 최고의 가치를 목표로 하는 클래식 디자인을 하려 한다. 많은 디자인들이 사라져가고 쓰레기가 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영원히 빛을 발하는 가치를 지닌 디자인을 할 것 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늘 연결되어 있고 끊임 없이 우리와 대화 하며 소통하고 있다. 그것의 결과인 유산은 영원히 숨쉬고 있다. 나는 '상일의유산'에 영원함을 불어 넣는다는 생각으로 디자인한다. 그래서 오랜시간 영속성을 가지고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중요시 여긴다. '현재의 나'가 기록을 함으로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가르친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헤아리려 고민한다.

새로운 디자인을 위하여 

지금까지 알고 있는 디자인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 

새로운 디자이너의 역할을 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열심히 한다.

디자인 이야기 첫 번째

90년대 초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태어나고 처음 스스로 달달 외우게 된 노래는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1994년, 8살 초등학교 1학년 때 학예회에서 그린 그림이 1등을 했다. 어릴때는 나름 인생에 큰 사건이었는데 '왜 내가 1등이지?' 어리둥절했다.

2000년대 초반, 농구를 할 수 있는 체육시간과 점심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수업 과목은 '사회'와 '윤리와 사상(철학)'이 제일 재밌고 이해가 잘 됐으며 쉬웠다. 이 수업들은 내 인생에 근간이 되었다. 철학 수업시간에 중도(불교), 중용(서양 철학)이라는 단어, 단 몇 줄의 짧은 설명은 앞으로 내 디자인과 인생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매니아 음악으로 조명을 받던 홍대 앞에 형성되있던 언더그라운드 인디 음악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조선 펑크라고 불리던 크라잉 넛을 좋아했고 다이나믹 듀오, 가리온 같은 한국 힙합 그룹을 동경했다. 그 영향으로 주류의 관성에 맹목적으로 갇히지 않게 되었고 소신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2004년, 1998년 결성된 한국 힙합의 클래식, 가리온의 1집이 12월 16일에 발매됐다. 이 앨범을 통해 '클래식'이라는 뜻을 처음 이해 하게 되었다. 2004년이 2달 남았을 때,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007년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처음 디자인을 배웠다.

그때 제품 디자인은 당연히 핸드폰 디자인이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3월 2일 첫 디자인 수업을 들었다. 첫 강의, 첫 숙제를 부여받았다. 밤을 꼬박 새워 고민하며 '평면 조형' 과목에 첫 주제인 '통일, 강조'를 작업했고 3월 9일 아침, 긴장해서 덜덜 떨며 더듬으면서 발표를 했던 기억이 난다.

1학년때는 대학 도서관에 꽂혀있던 책을 읽으면서 디자인이 무엇인지 이해했는데 해외를 누비는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담은 '디자이너가 말하는 디자이너'라는 책을 보고, 몇 개월 마다 전 세계의 나라와 도시를 이동하며 프로젝트를 한다는 내용에서 디자이너란 참 멋진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은 디자이너로서 출장갈 겸 놀고 오는 거지, 관광으로 가는 건 멋지지 않아!'라는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고집한 덕분에 정확히 그로부터 10년 뒤 첫 출장 겸 유럽여행을 갔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술을 마시면 선배, 동료들과 디자인을 뜨겁게 토론했다. 누구보다 진지했고 뜨거운 나날이었다. 그래서 뭐든지 잘하고 싶은 의욕이 넘쳤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 동아리에 들어가서 내 컴퓨터가 놓인 내 자리가 처음 생겼다. 처음으로 생긴 내 자신의 공간에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1~2학년 내내 동아리 방에서 먹고 자면서 밤 새워가며 열심히 뭔가를 했지만 마음 먹은 대로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1살, 1학년생인 나는 23살이면 디자이너로서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23살이라는 나이는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나이였다. 그리고 많은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의 명작이 20대에 이루어진 것이 많다. 지금도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20대에 자신의 활동으로 이름을 알리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이벤트가 많이 있다. 

당시 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열망은 커져갔다. 그때 내 목표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나를 필요로 하고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이게 얼마나 큰 목표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1학년 때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라는 한손에 잡히는 노란색 표지의 책을 읽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그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TED에서 강연을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인터넷으로 어찌어찌 접하게 된 MIT media lab은 실제로 세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바꾸는 가장 멋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당시는 한국 디자인이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도기였다. 나는 이 시점에서 받은 기초 조형 교육에서 큰 아쉬움을 가졌었다. 하는 고생에 비해 기본기와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효율성과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대로 가르쳐 주고 정확한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개인의 감과 노력에 의존해 스스로 깨우치고 거의 혼자서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과거 한국에서 나오는 디자인들이 세계와 종이 한장 차이가 생겼던 이유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때문에 나이와 경험보다는 비전과 실력으로 말해야하는 디자이너로서 십 수 년 후 미래에 처하게 될 도전적인 상황에 늘 불안했다.

2008년 봄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해였다. 가장 잉여롭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 가장 쓸모없이 허비했기 때문에

모든 물음이 결론이 났고 모든 계획이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 어떠한 고민도 의미 없어졌다. 또 디자인을 위한 전방위적인 나만의 훈련이 완전히 틀이 잡혔고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2008년 8월 15일 잠실 올림픽 경기장 서태지 콘서트. 두근두근 무대 앞쪽에서 서태지를 봤다. 서태지라는 스타는 나에게 늘 영감을 준다.

 MUNI(무인양품), 책 슈퍼노멀, 책 디자인의 디자인, 책 디자인의 요소들(저자 : 게일 그리트 하나)을 보고 그들의 철학에 심취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사소한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나 하기 힘들고 실력과 탄탄한 기본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는 것에 동감했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에 글은 안 읽고 사진, 그림만 주로 봤다.) MUJI와 Uniqlo의 홈페이지와 매장을 들어섰을 때, 느낄 수 있는 모든 경험과 그것을 아우르는 아이덴티티라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23살 때 홍콩에서 우연히 들어간 대형 MUJI 매장은 인상 깊었다.) 그들이 제공하는 경험에서 받은 인상이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과 가치관, 태도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이처럼 매장 곳곳을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제품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디자인을 탐구하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디자인의 오늘' 전시를 소마 미술관에서 봤다. 내 인생 전시였지. 거기서 5.5 DESIGNERS를 처음 봤다. 열광했다. 

나중에는 FRONT DESIGN이 누군지 알게 됐다. 이런 두 팀을 부러워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Dieter Rams의 1940년대 이후 주요 작품을 접했을 때 지금도 흉내 내기 힘든 클래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디자인에서 기본이라고 생각하던 이치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GOOD DESIGN의 결정체였다.

서울이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되었고 잠실에서 2008 서울 디자인 올림픽이 열렸다. 학교에 두 명의 디자이너가 방문했다. 세계적인 유니버설 디자이너 Patricia Moore의 강연, 그 이후 서울 디자인 올림픽 총괄 감독인 권은숙 휴스턴대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디자인 이야기 두 번째

201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의 신진 교육자분들이 노력한 결과, 학교와 밖을 막론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열렸다. 

나의 뒤 세대들은 굳이 외국으로 떠나지 않아도 새로운 환경에서 얻는 통찰, 탄탄한 기본기와 수준 높은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세계무대를 누빌 것이다. 내가 처음 디자인을 배우던 시절, 과도기에서 성숙기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며 얻는 경험은 나에게 디자이너로서 더 단단한 의식을 가지게 했다. 이제는 친구, 동료들과 했던 욕(?)은 더 잘하고 싶은 열정이자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이미 나보다 수준이 뛰어난 상태로 시작하는 어린 학부 학생들에 감탄하면서도 도태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한다.

2011년은 Steve Jobs가 살아있었다. 

2012년 상일의유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iphone 4를 처음 사용했다. 세계적인 네덜란드의 업사이클 디자이너 Piet Hein Eek가 학교를 찾아와 강연을 들었다. 디자인 다큐멘터리 영화 'Objectified'를 봤을 때 큰 공감을 했다. IDEO를 접했다. 그들은 인간 중심 디자인 툴킷(Human-centered design toolkit)을 개발했고 'Design thinking'(디자인적 사고)라는 것을 전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디자인을 이용하여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멋진 사람들이었다.

2014년 10월 졸업 전시회를 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인 생애 첫 전시회를 가족들이 함께 해줬다.

 그 기간에 서태지가 7년 만에 새로운 노래를 발표했다.

졸업 전시 수업차 과천 국립현대박물관에서 본 전시 'THE FUTURE IS NOW'. 

어느새 우리가 미래라고 일컫던 많은 것들이 상용화되어 있었고 더 이상 미래가 아니었다. 미디어에서 IDEO의 창립자인 David Kelley가 세운 스탠포드 D 스쿨에서 'Design thinking'을 배우는 것이 인기라는 기사가 보도되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김00교수님이 졸업 작품을 지도해 주실 때 내 EASY HUB 쉬운 허브를 보시고 nendo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nendo는 자유로운 생각을 선입견 없이 오브젝트에 투영하는 것과 디자인의 시각적인 느낌이 나와 닮아 있었다.

다만 나는 나의 고정관념의 틀을 계속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들기를 거듭하면서 디자인을 해야 한다. 난 늘 자신이라고 디자인된 틀과 싸워야만 한다. 넨도는 거기에서 자유로워 보여서 부러웠다.

2015년 사회의 일원이자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가족, 동료, 후배, 자식과 어떤 삶을 살고 좋은 영향과 본보기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실천해야 할 날이 멀지 만은 않다는 것을 느꼈다.

2016년 2월, 학부 졸업을 했다. 

평소 늘 존경하던 홍00 교수님은 늘 '혁신에는 늘 확고한 주장(고집)과 신념, 철학이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가치'에 관해 열정적인 가르침을 주셨다. 그 분의 가르침은 진짜 디자인이었고 디자이너가 되는데 기본 밑거름이 됐다. 그는 '진짜 교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와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영원한 교수님이다. 그 분의 박사 논문은 10년이 지난 후 나에게 읽혀졌다.

 그의 제자인 김00 교수님은 '진보적인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비전'을 몸소 활동으로, 강의실에서는 강의로 보여주었고 롤모델이 되었다. 그 분의 활동은 이정표가 되었다. 앞으로 나의 디자인 삶에 많은 영감과 화두를 던졌다. 그 분의 95년 석사논문은 21년이 지난 후 나에게 읽혀졌다. 

학교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어린 시절 열심이었던 나를 뒤로 한 채, 이제는 그때는 크게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교수님들의 교육,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개성을 지닌 여러 잠재력 있는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얻은 소소한 경험들이 나를 이렇게 크게 성장시켰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 분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Tesla 열풍이 불었고 Space X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IDEO의 창립자 Tom Kelley의 'creative confidence'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는데 책을 읽지 않았는데 제목만 본 순간 큰 공감을 했다. 어쩌면 한 사람이 그가 가진 능력을 뛰어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능보다는 의지나 열정, 인내, 좋은 태도, 깊이 있는 사고가 열쇠가 아닌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droog는 내가 되고 싶은 디자이너의 모습에 영감을 준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스치듯이 별 생각 없이 접했다. 

처음 디자인을 공부할 때부터 신선해서 늘 뇌리에 남았던 디자인들이 알고 보니 droog의 디자인이었다.

2016년 9월 3일,

10년 전부터 지켜봐왔던 디자인하는 사람들, 대학동료들이 멋진 무엇이 돼있거나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10년 전부터 쭉 해왔던 나의 기록 속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점점 가깝게 마주하여 대화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뜨거웠고 고민이 많았던 어린 '나'와 멋진 그들을 보며 자극을 받고 열심히 한다.

10년이라는 쉽지 않았던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다. 10년 전 2007년 3월 2일 디자인을 처음 시작했고 첫 강의에서 첫 숙제를 받았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 호흡한다. 과거와 미래는 서로 이어져 있는 약속이다. 항상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가르쳐왔고,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제시를 해준다. 또한 미래의 나는 다시금 그때의 나를 찾게 될 것이다.

'현재의 나'가 기록을 함으로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가르친다.'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헤아리려 고민한다.

2017년 9월. 

서태지 25주년 콘서트에서 '난 알아요' 춤을 추는 서태지를 다시 만났다. 

9월에는 London Design Festival 2017, 12월에는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 2017에 참여했다. 런던에서 skandium의 창립자 Christina Schmidt를 만났고 그녀의 추천을 받아 자신감있게 세계 유수의 회사들에 나의 디자인을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그녀를 My London boss라 부른다. 네덜란드에서는 5년 만에 Piet Hein Eek를 다시 만났다. 

지금까지 6년 동안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참으며 쉼 없이 달렸다. 그 동안 반쯤 미쳐있었을까. 

이제 겨우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 같다. 이제 세 번째 페이지 차례다.

디자인 이야기 세번째

2018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포리살로네 TORTONA에 초청 받았고, 밀라노에도 My boss가 생겼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완전히 봉인해제 되었다. 세월이 지나 조금 나이가 찬 걸까. 아무튼 이제 벌써 세 번째 페이지니까.

눈 깜짝할 사이의 십년이었다. 운 좋게 몇 나라를 여행하게 되면서 먹고 살아보려고 발에 땀나듯 뛰고 파이팅만 넘치게 들이댔다. 당연히 실수와 실례를 많이 했다. 알다시피 결과는 없었다.

20대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부터 먼저 배워야 했다. 동시에 디자인에만 몰입했다.

2007년, 다양한 것에 의욕이 들끓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해 후회스럽다. 청춘은 즐거워야 했다.

2017년, 31세. 집밖에 나가지도 않는 내가 30대에 처음 혼자서 여행으로 모험을 즐기게 되었다. 역시 청춘은 즐거워야 한다.

처음 런던에 가기 전과 지금, 나보다 앞선 많은 분들이 시도에 도움, 용기, 따끔한 조언을 주신다. 그들은 영 디자이너들을 발굴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05년, 재능이 부족해서 갖은 멸시를 견뎌냈다.

2007년, 리얼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를 전부 뜯어버리고 개조했다.

방구석에서 디자인을 할 때면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고 행동했다. 허세는 필수지.

남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시행착오가 많았다. 남이 알려주어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겪어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늦게 가고 있다. 그러나 늘 내가 잘 가고 있다고 느꼈고 대단하다는 이들의 노하우를 접할 때 마다 수 없이 '그래! 그거야! 그렇지!'하였다. 남들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상하다. 그래서 계속 갈 길을 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열등감의 보상심리는 얄팍한 우월감을 만들었다. 내 것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 고립시키고 자기방어와 건방을 떨었다.나보다 나으면 폄하했다. 그렇게 허세를 떨었다. 능력은 부족한데 의욕은 우주 같았다.

행복을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이제는 뭘 아는 사람들은 보면 대꾸도 안할, 옹졸한 포트폴리오라는 게 생겼다.

그래도 아마추어로 서할 건 한 거 같다.이런 나여서, 디자인 공부를 이제 시작하는 이들에게 늘 힘이 되고 싶었다. 나중에 내가 받은걸 돌려주고 싶다. 대화할 기회가 생길 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불씨를 살리고 격려를 해주려고 한다.

일단 그들은 나보다 나은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나도 하고 있는데. 그들의 다음 스텝은 아무도 모르니까. 어벤져스를 봐라. 몇 가지 중요한 디자인을 거쳐 '분홍 새 대가리'를 하나 만듦으로서, 그렇게 상일 디자인의 스타일에서 첫 번째 화법이 확립되었다.

2019년,

많은 인물군상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사회적 성공은 인간성과 관계없다. 인간적 완성은 지능이다. 나는 지능이 낮다. 오래 전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잘못도 했고 실수하며 패를 끼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때까지 타인에게 고통을 받는다고만 착각했다.

내 인생에서 정말 다행인건 첫 번째, 쫄보이고, 두 번째, 인생에서 양심이 사시나무 떨리는 경험도 해봤다는 것이다. 혹독한 반성, 후회, 고통에 악몽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몇 가지 트라우마. 진짜 인생이다. 명랑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소년이 인간이 되고 있다.

나는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고, 늘 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인생을 살아내야만 했다. 아주 당연하다는 모든 것이 고귀한 결과임을 깨달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쯤. 여전히 내 자신을 반쪽짜리 디자이너라고 생각. 거의 모든 면에서 쉽게 얻는 것은 없다.

점점 두려워지고 있다. 지금은 안개 속에 가려져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한계에, '부딪히면 아프지 않을까?' '다시 부딪히면 이길 수 있을까?'

​디자인 이야기 네번째

2019
로잔나 올란디에게 링크드인으로 작품으로 보내니 그녀가 내 작품을 포리살로네 2019에 자신의 갤러리에 초대했지만 서류 문제로 합류하지 못하였다.

 

오늘도 밤이 어둡다. 그래도 한 발자국 더 때야지. 어느새 입술은 굳게 다물어지고 순하게 쳐진 눈은 뱀눈이 되어 있었다. 벌레에서 인간이 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안다. 어떻게 하든 인생은 이어져야 한다. 계속 걷자.

친구가 없는 20년의 시간을 킬링 타임으로 상일의유산을 만들어버렸다.

2021
30대가 되어도 반복되는 잘못, 실수, 죄의식, 처절한 후회, 반성, 죄책감, 고통, 악몽. 나라는 인간은 디자인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일개 작품 기술자일 뿐이다.


앞만 봤더니 길이 꼬불꼬불했던 걸 알지 못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밤길이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내가 누구를 밝고 걷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안보이는 밤길은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고 혼자서 그리 멀고 먼 길을 기꺼이 걷게 했다. 알면서도 기꺼이 했다. 밤이 어두우니 한 발자국 떼자고 말했던 나는 이제 밤길에 걸음을 재촉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걸을 필요 없다. 누구를 밟으며 무엇을 위해 멀고 먼 길을 걸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2022
추구하는 것에 인생을 걸고 모든 정열을 바쳤다. 디자인, 사랑, 공부. 물론 남은 것은 없었다. 원없이 하여서 후회는 안되지만 마음이 많이 아프다.  끝은 절벽이었다.
처음으로 디자인을 포기하려했다. 평생 가장 사랑하던 디자인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만두지 못했다.

2023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그 시절 나는 강백호였다. 허공에 대고 승리를 외쳐라.

 

핸드폰에 가족 사진을 배경으로 넣었다. 내가 죽으면 이 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진다. 내가 행복하면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이 사람들 말고는 철저하게 혼자다.
아무튼 이대로 끝까지 살다가 죽는거다. 결국 내가 죽어야 끝나는 상일의유산 이라는 제목도 이런 방식으로 지켜지게 되겠다.


2024

[전인권의 물고기, 전인권의 돌고 돌고]
드래곤볼의 베지터, 원펀맨의 사이타마, 삼국지 사마의에 감정을 몰입했었다. 초한지에 빠졌고 열국지, 대진제국에도 빠졌다. 그게 내 디자인 공부였다.

유산을 남기겠다는 포부로 상일의유산을 했다. 디자인을 할 때 극단적으로 행복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것을 뚫고 지금까지 왔다. 지금은 디자인을 처절하게 저주하게 되었다.

[홍익현의 슬램덩크]
2024년 9월 어느날 형들이 말해줬다. "생각보다 너 ( 상일의유산)를 사람들이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누가 나를 보고 있었네', '내가 잘 행동하고 있었나?' 다시 노이로제 같은 죄의식과 강박이 엄습했지만 그걸 넘어설 정도로 힘이 됐다.

싼 값으로 치른 초심자의 행운이 있었고 돈이 안된다. 그래도 내 삶이 가치가 있다는 건가. 돈 벌고 싶다는 내게 형들이 뭔가 준비해보라고 말해주었으나 선뜻 손을 잡기 부끄러웠다. 알량한 잔재주로 뭘한다고.
돈 벌고 싶다면서 그랬다. 그냥 아저씨 한명일 뿐이다. 내게 남은 건 상일의 유산. 그리고 세간의 호불호와 애매한 평가. 사람 구실을 하고 싶다. 아무튼 모든 것이 돈이 되냐 안되냐로 보이자 유일한 프로세스인 내 의식의 흐름에서 창의성과 영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재능이 없었던 나는 정말 기대이상으로 올라온 건 사실이었다. 나의 열정은 강백호였고 재능은 홍익현이었다. 
모두가 나를 신경쓰지 않던 2012년 부터 2017년 어느 순간, 갑자기 홍익현은 3점슛을 쐈고, 분명 홍익현은 자신이 멋있는 선수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팩트는 홍익현이었던 나는 슬램덩크를 성공하긴 했다.

PAPER

2024

Relativity of Contemporary Memetic Experience in Data Environment

The 6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motion and Sensibility
(ICES2024_Summer Proceedings), Korean Society of Emotion and Sensibility

2023

Self-presentation Design Activities for Adolescents to Form Resilience and Non-Contact Online Platform Design : Before and After the COVID-19 Pandemic and Endemic

Design Works (KCI),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This work is a Revised-Supplement of the Sangil Jeon’s Master Project Report at the Hongik University in 2021)

2021

A study of the non-contact self-presentation personal identity design activities to help the adolescents form resilience : in the covid-19 pandemic situation

Master project report, Hongik University

STUDY​​

2022 - 

Kookmin University, TED, SEOUL, SOUTH KOREA

Department of Design Science

Ph.D student

2021

Hongik University, Graduate school, SEOUL, SOUTH KOREA

Industrial Design, School of design 

Master of Fine Arts

2016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SEOULTECH), SEOUL, SOUTH KOREA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ndustrial Design, Dept. of Design

Bachelor of Design

AWARD​

2024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motion and Sensibility

(ICES 2024 Summer), Korean Society for Emotion and Sensibility

Special Award

2023
2023 Zayton Cup International Design Competition in Quanzhou
(WDO, CEIDA, Quanzhou Industrial Design Association)
Winner, 우수상(Merit Award)

2021​

A' DESIGN AWARD 2021

IRON WINNER

​​

2020

CCDE 2020 Suzhou CHINA

(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UCCN), CCDE Suzhou CHINA, New Crafts Movement)

Excellent products of 2020 New Crafts Movement

​​​

ASIA DESIGN PRIZE 2020

FINALIST

​​

2019

​LEXUS DESIGN AWARD 2019

Shortlist candidate, whose submitted works have been nominated

​​

​2018

CHRISTMAS DESIGN AWARD 2018 by designboom

Shortlisted as Top 50 and exhibition in OSAKA DESIGN FUTURE 2018, in Grand Front Osaka in OSAKA, JAPAN, Art scramble

​WIX STUNNING AWARDS 2018
Finalist 

​​

2018 Quanzhou Talent Harbour Project 3D printing innovation and startup competition program

Quanzhou Industrial Design Association, Quanzhou 3D Printing Innovation Strategic Alliance, WDO

Shortlisted as Top 50

SHOWCASED

2024

the Artling(SINGAPORE)

FEATURED​​

가구 소식(Funiture News)(SOUTH KOREA)

D5 Design Magazine(SWISS)

CCDE 2020 Suzhou(CHINA)

Arche Inspirations E20(PARIS)​

designboom(MILANO)

AD(Architectural Digest) (RUSSIA)

'DESIGNER' Haaretz newspaper(ISRAEL)

design mate(RUSSIA)​

the Artling(SINGAPORE)

thesignspeaking(MILANO)

MONTHLY 'DESIGN'(SEOUL)​

SEOUL DESIGN FESTIVAL(SEOUL)

100%design LONDON(LONDON)

AUCTION​​

CATAWIKI(2021)

COLLECTED​

2020 - now

CCDE Suzhou(CHINA)​

2018 - 2023

Asia Design Milano(MILANO)

SOLO EXHIBITION

2024

자기 제시 디자인 활동(SPDA)

넥스디(NEXD) 기획전(개인전)(한국 디자인 진흥원(KIDP))

SANG YOU SO MUCH 2024

넥스디(NEXD) 기획전(개인전)(한국 디자인 진흥원(KIDP))

EXHIBITION

2024

Design Art Fair 2024

(Seoul Arts Center(예술의 전당), Hangaram Art Museum(한가람 미술관))​

​2021​

MILANO DESIGN WEEK 2021 FUORISALONE

2020

CCDE 2020 Suzhou CHINA

(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UCCN), CCDE Suzhou CHINA, New Crafts Movement)

​MILANO DESIGN WEEK 2020 FUORISALONE

​​​

​2019

YOUNG CREATIVE KOREA 2019(COEX in SEOUL, SOUTH KOREA)

2018

​YOUNG CREATIVE KOREA-F 2018

(ARA MODERN ART MUSEUM in SEOUL, SOUTH KOREA)

YOUTH DESIGN DAY 2018 in OSAKA, JAPAN

(The Italian Institute of Culture in Osaka,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SAKA DESIGN FUTURE 2018 in GRAND FRONT OSAKA, in OSAKA, JAPAN​(CHRISTMAS DESIGN AWARD 2018 by designboom)

MILANO DESIGN WEEK 2018 FUORISALONE

(TORTONA Design District, ASIA DESIGN PAVILION) www.asiadesignmilano.it

2017

​SEOUL DESIGN FESTIVAL 2017

​(by 'MONTHLY DESIGN' magazine, COEX in SEOUL, SOUTH KOREA) 

​LONDON DESIGN FESTIVAL 2017​(100%design 2017 in OLYMPIA LONDON)

​​

2014

​SEOULTECH ID SHOW 2014​(GRADUATION SHOW)

bottom of page